차를 우려냅니다. 나에게 따뜻한 물을 공급합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렇습니다. 그것밖에는 할 수 없었습니다. 애써 꺼내 본 첫 문장은 너무 흔하고 지루하기 짝에 없습니다. 따뜻한 것이 식도를 타고 흘러내려 갑니다. 그것이 당신의 내부도 데워 줄까요? 아니면 그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일까요? 나는 스스로를 속일 수라도 있다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책을 왜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들었습니다. 난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문제였으니까요. 그래도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려고 했습니다. 독서라는 것 자체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는 적극적인 행위들 중 하나이기도 하니까요. 나는 그런 것에 훈련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책은 단숨에 재미없어진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당신과 나는 알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독서라는 행위의 당위성이 문제였습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게다가 생활을 영위하는 것만으로도 치열합니다. 어쩌면 독서를 왜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이토록 재미있는 것 많고 바쁘기까지한 현대 사회에 대한 불만의 한 표현인 것일까요? 재미는 있지만 영양가 없이 나를 잡아먹는 것들과, 몇 푼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분투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 대한 원망처럼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몇몇 사람에게 독서는 좀처럼 우리의 말초신경을 자극하지 못하고, 실용적이거나 효용가치가 거의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럼 독서에 대해 간단히 마음을 접으면 될 일입니다. 그렇지만 북적거리는 지하철 서점가를 지날 때 베스트 셀러라는 문구는 속을 거북하게 하고, <총, 균, 쇠>를 잃어 보았느냐는 지인의 질문을 고통스럽게 웃어넘깁니다. 분명하게도 저는 독서에 대한 이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고백하자면 책은 저에게 일차적으로 너무도 큰 오락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 뒤에는 겨우 숨 쉴 수 있는 숨구멍이 마련되었습니다. 외면하고 싶던 현실과 나를 묘하게 화해 시켜주었고, 어떤 것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것에 굴복하지 않아도 된다고 강제로 무릎 꿇린 나를 일으켜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이토록 지극한 독서의 기쁨을 타인에게 소개할 필요도 이해시킬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책을 읽기보다는 더 재미있는 것을 하면 좋겠다고 답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나에게 문제는 오히려 글쓰기였습니다.
글쓰기는 어쩌다 내가 이토록 원하는 일이 되어버린 것일까요. 글쓰기에 파고들수록 나 스스로가 악화되어감을 느낍니다. 머리를 쥐어짜 보았지만 내가 쓰는 건 이미 있는 이야기 같았습니다. 비슷한 사유이거나 더 뛰어난 것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독서를 통해 나도 모르게 한껏 높아져 있는 나의 안목을 철저히 불만족으로 빠뜨리는, 일종의 폭력이 나로 인해 자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무능력함을 확인함과 동시에 내가 읽고 싶은 것을 쓴다는 깊은 매력 사이에서 거의 매번 무너지고 맙니다. 언젠가는 자기만족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글을 끌고 가는 명민한 조타수가 되는 날이 올까요?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해줍니다. 그나마 자신에게 가장 지극한 기쁨인 독서를 왜 하는 것인가에 대한 글쓰기만이 나로서는 명확하게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물론, 이것이 나에게 던져졌던 왜 책을 읽어야 하냐는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 질문은, 마치 당신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왜 하필 그 사람인지 명확한 이유를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이니까요.
그러한 질문들 중에서도 유독, 문학이 왜 필요한가? 라는 의문이 가장 많을 것입니다. 사회학자 마이클 샌델은 자신의 서재를 공개하며 자신은 문학을 읽지 않는다고 수줍게 고백합니다. 자신의 아내는 문학을 읽지만, 자신은 그렇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문학을 읽지 않는다는 그 수줍음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요. 책으로 빼곡한, 세계적인 석학의 멋진 서가에 단 한 권의 문학이 없다는 사실이 왜 부끄러웠던 것일까요. 그 죄책감, 우리가 예술 세계를 멀리하고 실은 실용주의자라는 것이 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학자 해럴드 블룸이 가장 명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의 편지는 그의 문장으로 마쳐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