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대전 직후 미국 동부를 중심으로 풍요와 화려함, 재즈 시대, 셀 수도 없는 파티의 나날, 그리고 신분 상승. 스콧 피츠제럴드를 생각할 때 저에게 떠오르는 이미지들입니다. 물론 <위대한 개츠비>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와도 같은 멋진 작품들이 떠오릅니다. 또한 사소해 보일지 모르나 곳곳에 깃들어 있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 역시 보석과도 같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성체강복식>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들려드릴 생각입니다. 닳도록 읽은 이 단편과는 달리 단 한 번 읽고 다시 펼쳐 보지 못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버니스 단발머리를 하다>입니다. 또래 사이에서 소외되어 보이는 소녀 버니스에게 여자아이들이 다가옵니다. 친한척하며 내일 유행하는 단발머리를 하고 나오자고 제안합니다. 드디어 또래 여자아이들과 친해지는 것이라고 기대했던 버니스는 다음 날 자신의 긴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기다리지만, 여자아이들은 머리를 자르지 않고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여자아이들이 자기를 속인 겁니다. 이야기를 읽으며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어른들의 눈에는 전쟁의 상처나 기근 경제 대공황도 아니고 범죄도 아닌 이 사소한 사건에서 아이들은 쓰라린 아픔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저마다 이러한 아픔을 품고 자란 어린아이가 바로 우리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지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탁월했다고 여겨지는 점은, 바로 피츠제럴드의 섬세한 시선입니다. 백인 남자이자 지식인이던 작가는 어떻게 어린 소녀들 사이에서의 이러한 사소한 사건을 통해 상처받은 영혼을 포착하고 연민을 느낄 수 있었을까요. 나는 나와는 다른 사람의 존엄성에 대해 이토록 세심한 시선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요? 내가 아니고, 나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모르는 사람의 인권과 존엄에 대해 이야기하는 용기를 생각합니다. 이토록 높은 사랑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경험과 겸손한 마음이 필요한 걸까요. 나는 당신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걸까요. 나에게 그런 지혜와 용기가 깃들기를 간절히 바라보는 밤입니다.
참고문헌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콩고의 판도라』, 정창 옮김, 들녘출판사, 2009.
알론소 꾸에, 『고래여인의 속삭임』, 정창 옮김, 들녘출판사, 2008.
앨리스 밀러, 『폭력의 기억,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 신홍민 옮김, 양철북출판사, 2006.
안톤 체홉, 『사랑에 관하여』, 안지영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아가씨와 철학자』, 박찬원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