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가을에는 벚나무의 밑동이 잘렸습니다. 벚나무 전염병 탓입니다. 이윽고 뿌리까지 뽑혀 가로수가 있던 자리마다 평평한 무덤이 생겼습니다. 봄이 올 때마다 다른 나무들과 달리 붉은 기 없이 유난히 하얗던, 항상 가장 먼저 움트던 벚나무는 이제 없습니다. 봄의 산책길에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표지로 삼고 찾아내던 눈길을 이제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 내년 봄이 별로 기다려지지가 않습니다. 스스로가 기대하는 마음이 적은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겨우 봄날의 가장 먼저 만개하는 벚나무를 기다린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매년 봄이면, 새로 덧입힌 자국이 곳곳에 남아 있는 아스팔트 도로와 기름기 머금은 공업사와 낡고 오래된 빌라들을 제법 근사한 장식으로 꾸며주고 나면, 귀한 사람의 결혼식에 초대된 듯이 감사했습니다. 매번 움트려 가지 마디마다 애를 쓰고 질병과 벌레를 이겨내는 노력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이, 좋은 것만 취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타인의 노력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일 것입니다. 이토록 무신경한 것을 보면, 우리의 가난하고 얕은 인식의 깊이가 결국 장벽 그 자체가 되고 말아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도 나는 당신에 대해 생각합니다. 어제와는 조금 다르게 당신을 떠올립니다. 영영 보상받지 못하는 당신의 노력과 그 와중에도 당신의 좋은 것만을 취하려는 기회주의자들의 무리 속에 있는 나 자신을 말입니다.
내게는 한 번 읽고 다시 읽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신문의 부고란에 떠오른 이름들보다 왜인지 어떤 문학작품에서야말로,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근원적인 고독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그것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제가 다시 만지지 못하는 이야기는 바로 플래너리 오코너의 <강>이라는 단편입니다. 한차례의 전쟁이 끝나고 나면 전후 상처의 극복이라는 평생에 걸친 전쟁이 비로소 시작됩니다. 나라 전체가 윤리 의식의 기반이 무너지는 와중에 누군가는 주인공의 부모처럼 늘 술에 빠져 자녀를 방임하고, 누군가는 주인공의 보모처럼 헛된 종교에 매혹되어 거기에 매달릴 것입니다. 당시 유행하던 트레일러를 끌고 다니며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이비 종교집단은 주인공의 보모를 사로잡습니다. 부모에게서도, 쌀쌀맞은 보모에게서도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정서적으로는 이미 전쟁고아나 다름없는 작은 소년은 사이비 교주가 행하는 강에서의 세례식을 보며 작은 희망을 품습니다. 세례를 통해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이것이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는 이단자의 말에서 소년은 믿음 같은 것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현실은 점점 더 견딜 수가 없어집니다. 소년은 한계에 다다르게 되고 비록 세례를 집행하는 교주는 없지만 스스로 강에 들어갑니다. 물속에 다 잠겼는데도 아직 다시 태어나지 않고, 그저 더 깊고 깊게 발이 닿지 않는 순간까지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소년의 나아감, 그 순수한 의지에서 독자인 나는 비로소 진정한 신앙과 종교적 순간을 만나게 됩니다. 애석하게도 이야기에 등장하는 설교자, 그를 맹신하는 신도들의 무리와 보모를 포함하는 등장인물 중 그 누구에게서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자살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소년의 순수한 믿음, 가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던질 수밖에 없었던 소년이 처한 상황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작은 소년을 죽음에 이르게 한 모든 요소에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술에 취해 방임을 일관하는 부모를 비롯하여 작은 아이에 대한 애정이나 연민조차도 없고 일말의 직업의식조차도 기대할 수 없는 보모가 심어준 헛된 믿음, 이 모든 것을 탓해야 할까요. 혹여 그들도 한낱 희생자일까요? 아마도 전쟁은 공식 종료되었다는 선언 이후에도 여러 방식으로 인간을 죽일 수 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자는 너무도 연약한 존재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우리도 이미 알고 있지요. 다만, 그 연약한 존재들이 바스라질 때 우리의 일부도 같이 죽어버리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