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보이는 것이 보는 자를 수동적인 존재로 머무를 수밖에 없게 만들면서 그의 안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기입되는 사건이 있다. 보이는 것이 스스로 보여지기를 그치고 우리 안에서 흔적으로 스며들어 보이지 않는 원음악으로 울리는 사건이 있다. (중략) 보이는 것은 어떠한 상처(스크래치)도 남기지 않고 우리 눈에 고정되어 있기를 거부하면서 터졌다가 흩어져 가는 불꽃처럼 우리 안에서 사라져간다.
모리스 블랑쇼, <기다림의 망각> 중에서
당신에게,
나의 저울은 항상 바쁩니다. 어떤 일은 결국 어떻게 흘러갔습니다. 하나의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서 셀 수 없는 이유들이 인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일은 어떻게 지금의 결과가 되었을까요. 그 질문에 쉽사리 답을 하지 못하고 그저 어떤 요인이 더 큰 영향을 주었는지 저울질하기 바쁜 이유를 당신은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저울을 사용하는 것은, 어떤 일이 어떤 결과의 원인이 되었는지 면밀히 파악하고, 이를 통해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하거나, 더 나은 선택을 기억해 두려고 하는 일종의 생존본능일까요.
당장 바스라질 것 같은 한 사람이 저울을 사용합니다. 새로운 추를 들어 올릴 힘이 없이 머뭇거린다면 그 행위에서, 그 저울질이라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지경이 되지만, 이윽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보다 중요하다 여기며 더 집착하는 삶의 조각들을 붙들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결코 돌이킬 수 없었던 과거의 일들과 이런 식으로 사랑에 빠지는 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사랑인 것입니다. 과거의 망령들이 되살아나 우리의 숲을 장악하고, 생태계를 파괴해 놓으려는 것과 전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과거로 징집되어 갑니다. 지극한 사랑과 지극한 투쟁 사이에서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현재보다는 과거에서 살아가고, 우리의 삶에는 어쩌면 정확하지 않은 과거를 붙들고 습관에 가까운 되새김질만 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놀랄만큼 많은 힘을 빼앗기고 색채를, 선율을, 몸짓을, 셀 수 없이 많은 어휘를 거기에 다 쏟아붓습니다. 이러한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것들이, 당장 무너져 내리지 않는 것이 신기합니다. 작은 기적이 혹은 놀랍도록 허술한 나무로 만들어진 비계飛階가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일까요?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누군가 그토록 간신히 버티며 우리에게 내어놓은 그 색채와 선율, 몸짓, 무한한 어휘들이 무척 아름답다는 사실 이외에는 말입니다. 나는 당신이 두 손의 주먹을 꼭 쥐고 하려했던 말이 무엇인지 끝내 모릅니다. 당신이 울음을 겨우 참고, 입술을 깨물며 간신히 숨을 내어 쉴 때, 저울이 마침내 균형을 찾을 듯 찾을 듯 미묘한 움직임만 남았을 때 말입니다. 나는 느낍니다. 그저 나와 같은 사람이 여기 더 있다고. 우리가 국경과 무덤과 다른 언어를 넘어 만난다면 그 마주침만으로도 서로를 알아볼 것이라고. 그 눈길만으로도 우리가 얻는 구원에 대해 아주 오래도록 생각할 것입니다.